일본 아베 총리의 황당한 자부심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8-01-18 09: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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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환의 울산이야기(울산종합일보 논설위원 겸 필진부회장)
모방송국에서 위안부 관련 다큐방송이 있었다.

사실 이 위안부라는 용어도 가슴치며 통탄할 말이며 우리가 입에 올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철저히 가해자에 의한, 가해자들을 위한 용어 아닌가.


이땅의 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살육을 일삼은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단 말인가!


지배자들의 무능으로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던 허장성세의 대한제국, 그들은 궁지에 몰린 백의의 민초들을 감언이설로 혹은 협박과 위협으로 노동자로, 성노예로 일본 본토를 비롯해 동남아 각지로 끌고 가 지옥의 구덩이로 몰아 넣었다.


태평양 절해고도 동굴, 구해줄 나라는 없어졌고 의지하던 부모와 그리고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격리된 곳에서 하루에도 수십명의 짐승들이 달려들어 청초한 꽃밭을 유린하던, 마치 지옥의 한부분을 옮겨 왔을 것 같던 그곳에, 솥을 걸어 밥을 지었던 흔적이 아직도 선명했다.


짐승들의 눈을 피해 밥한숫갈을 입에 넣고 삼키지 못하고 차라리 목숨을 거두어 가기를 절규했을 그분들을 생각하니 찻잔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제 몇분 남지않은 할머니들, 그분들 삶의 시간도 인간존엄을 회복할 시간도 얼마남지 않은 2018년의 비통한 대한민국이다.


위안부로 통칭되는 우리 강제 징용자들은 1930년대~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온갖 고초를 겪었으며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여성들도 강제로 동원됐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년)과 중일전쟁(1937년)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장기화 되면서 군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하에 군 위안부제도를 만들었다.


끌려간 여성들은 열악한 군위안소에서 인간으로서 견딜수 없는 성노예생활을 강요당했다.


변변한 위생시설을 갖추지 않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루평균 10~30명이상의 군인들을 상대했다.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외출도 엄격하게 제한됐으며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위안부들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그들은 퇴각하면서 위안부들을 집단처형하기도 하고 퇴각소식을 알려주지 않아 폭격 등으로 많은 수가 사망했다.


살아남은 피해 여성들의 삶 또한 평탄하지 못했다. 가족과 이웃을 피해 숨어 살면서 대부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1992년 2월 정부에서 피해자 신고센터를 운영한 결과 234명이 피해사실을 신고했으며, 이중 대다수가 사망하고 2018년 1월5일 현재 31명이 생존해 있고 북한에도 218명의 신고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정부는 정신대 실태조사 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1992년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형식적이나마 일본의 반성과 사과를 이끌어 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3월 생활안정 지원금과 영구임대주택 우선입주권을 지급했고, 김대중정부는 1998년 일시불로 3150만원의 생활지원금을 지급했으며 매달 지급되는 지원금도 50만원으로 인상했다


2008년부터는 일시불로 4300만원의 생활안정 지원금과 매월 80만원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각 시·도에서도 자체적으로 지방비를 지원하고 있다.


한편 일본의 대응은 1990년까지는 민간업자의 소행이었다며 일본군의 관련을 전면 부정했으나 1992년 1월 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위안소 관련자료가 공개되자 어쩔 수 없이 강제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형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그러나 한국인 피해자 보상문제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2015년 12월28일 위안부 문제를 한국정부와 협상하고 타결했다.


일본정부는 내각총리대신 명의로 위안부문제에 대해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100억원을 출연해 위안부 피해자 재단을 설립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양국 국민 모두로부터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얼마 전 일본 아베 총리는 2차대전 중 스기하라 치우네의 행위에 대해 일본인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스기하라 치우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근무하던 일본영사관 영사대리였다.


부임 이듬해인 1940년 여름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내에서 리투아니아로 도망쳐온 유대인들이 각국 영사관에서 비자를 취득하고자 했으나 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으로 각국 대사관·영사관이 폐쇄되자 아직 업무를 하고 있던 일본영사관까지 유대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조건을 까다롭게 해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발급을 제한하고 있었지만 스기하라는 거의 무제한으로 발급해 한달간 비자의 수가 2000매가 넘고 그로 인해 6000명의 유대인이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다.


스기하라는 귀국 후 리투아니아에서의 행위가 문제가 돼 1947년 외무성을 사직하도록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1969년 그는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1985년에는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제정된 야드바셈 상을 수상한 뒤 1986년에 죽었다.


스기하라 치우네의 행위는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잘한 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이 단지 세사람만 있었어도 이웃 나라들을 침범해 온갖 악행을 서슴치 않은 나라와 민족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 총리는 일본인으로 자부심을 갖기 전에 2차대전시 조상들이 행한 잔혹하고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먼저 사죄하고 보상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럴리도 없겠지만 만약 우리대한의 조상들이 일본 국민에게 당신들이 우리에게 한 짓을 그대로 했다면 보잘것없지만 나는 당신 조상들이 원한을 풀지 못하고 묻힌 망자의 제단에 머리를 찧어 그 피로 사죄할 것이다.


그리고 생존자들을 찾아가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며 손잡아 줄때 죽음에 임박한 그들을 품에 안고 함께 울 것이다.


일본인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한 당신은 차마 그럴 수도 없겠지만!


참고 :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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