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ice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20-08-18 09: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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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종합일보 박하용 필진(세진중공업 관리/지원부문장 이사)
▲ 박하용 (주)세진중공업 관리지원부문장 이사
“인자함은 지나쳐도 괜찮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사람을 잔인하게 만든다” 북송시대 시인 소동파가 과거시험에서 답안지로 썼던 글이다. 900여 년 전이나 현시대나 별반 차이가 없나 보다. 때때로 정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한 절대적인 면죄부를 주곤 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명분으로 삼는 것이다.

칼을 제대로 쓰면 정의를 세우지만 잘 못 휘두르면 상대방은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과잉, 강압, 먼지털기 등이 정의실현의 이면에 숨어있는 또 다른 불편한 진실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고,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정의를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정의는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좀 막연해지지만 생각해보면 정의란 말은 그렇게 낯설지만은 않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심판하겠다”고 말하는 만화영화 속 대사나 한 손엔 저울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교과서나 책에서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헌법 재판소 앞에 서 있는 정의의 여신상이나 악인을 심판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나 모두 지은 죄에 맞는 공정한 벌을 주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가난해서, 여자라서, 어려서, 외국인이라서 차별받는 것을 보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반대로 어떤 유명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도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과연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정의란 ‘공정함’을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저건 참 공정하다’거나 ‘저건 정말 공정하지 않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정의나 공정함과 관련된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정의는 공정함을 말한다고 했다. 사실 많은 철학자들이 ‘정의’란 무엇인지, ‘공정함’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평균적 정의’와 ‘배분적 정의’로 나누었다.

‘평균적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를 말한다. 여기서 정의란 절대적 평균을 말하는데 이를테면 선거권 같은 것이다. 그 나라 국민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인정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배분적 정의’란 ‘다른 것은 다르게’를 말한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라’는 것으로, 급여를 주고 성적을 매길때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에게 그 만큼의 대가를 주라는 것이다.

존 롤즈(John Rawls. 미국의 철학자)는 정의와 관련해 두 가지 원칙을 주장했는데 하나는 ‘평등의 원칙’으로 모든 사람은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갖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차등의 원칙’인데 사회 경제적으로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사회에서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을 줄 때 정의가 실현된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저소득층에게만 문화비를 지원해 주는 문화 바우처가 있다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평등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 불평등이 그 사회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을 주는 복지혜택 이라면 불평등해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 영국의 철학자)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와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즈의 정의론을 마이클샌델(Michael Sandel,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소수의 권익과 자유지상주의의 사회적 합의에 대해 시원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마이클샌델은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면서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 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사회이다’ 라고 설파(說破)했다.

장자 ‘거협’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9000명의 무리를 이끄는 도척에게 그의 부하가 질문을 던진다.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습니까?” 그러자 도척이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엔들 길이 없겠느냐. 털만 한 집을 알아내는 것이 성(聖)이요, 가장 먼저 들어가는 것이 용(勇)이다. 그리고 어떤 물건이 가져올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빨리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지(知)다. 또한 가장 늦게 나오는 것이 의(義)이고, 나온 후에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아무도 없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사자의 몫(The Lion's Share)이라는 우화다. 사자, 여우 그리고 당나귀가 같이 사냥을 했다. 잡은 고기를 놓고 사자가 물었다. “어떻게 나누는 것이 좋겠는가?”, “공평하게 3등분으로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나귀가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자는 순간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당나귀를 잡아먹고 다시 여우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여우는 자신의 몫은 뒷다리 하나면 충분하고 나머지는 전부 사자의 몫이라고 했다. 만족한 사자가 물었다. “왜 이렇게 나누어야 하지?”, “방금 당나귀의 운명에서 나누는 방법을 배웠습니다”라고 여우가 답했다.

장자의 이야기와 이솝우화가 나름의 논리로 연결이 되는 것 같다. 두 이야기에서 연결된 지혜는 웃지못할 코메디 장르로 흘렀지만 바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 즉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분배를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철학자가 위에서 언급한 존 롤즈 이다. 그는 완벽하게 공정한 사람들이 모여 합리적으로 토론한다면 정의의 원칙에 맞는 사회적인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공정해질 수 있을까요?

그가 제안한 방법은 무지의 장막(The veil of ignorance)이 였다. ‘어떤 조건도 없는 평등한 입장’에서 토론하면 정의의 원칙에 맞는 사회적 합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다만, ‘무지의 장막’이라는 전제조건을 어떻게 충족시키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겨 두어야 한다.

이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가장 공평하게 빵을 나누는 방법’이다. 서로 더 큰 것을 가지겠다고 싸우는 형제에게 가장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원칙은 ‘빵을 자른 사람이 나중에 선택한다’라는 원칙을 정하면 되는 것이다.

소통과 협력이 잘되지 않는 두 부서가 있다. 여러분이 CEO라면 어떤 방법을 쓰겠는가? ‘부서장의 자리를 서로 맞바꾸어라!’ 삼성전자 권오현 회장이 ‘초격차’에서 밝힌 내용이다.

아직 우리사회에선 ‘정의로운 사람은 외롭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정의로운 사람은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소외되는 경우도 있는 현실이다. 사회 많은 부분에서 ‘정의’가 바로 서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는 데에는 그러한 ‘정의’의 기준이 상반되기 때문인 것 같다. ‘파우스트의 계약’과도 흡사하다.

우리가 정의라고 생각한 결단이 어떻게 보면 정의롭지 못한 결단일 때가 많다. ‘이것이 옳은 정의이고, 저것을 옳지 않은 정의이다’라고 한마디로 결론지을 수는 없다. 애초부터 정의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정의’의 반대말을 얘기할 때 말들이 많지만, 필자는 ‘또다른 정의’라고 말하고 싶다. 여러 방면의 입장들과 서로 다른 가치관만 있는 상대적인 정의를 고민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진정한 정의로운 결단은 무엇일까를 스스로 계속 생각하고 또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은 정의로운가?’, ‘나는 정의로운 리더리인가?’라는 공허한 메아리를 남기기보다는 ‘나는 정의롭고자 고민하고 노력하였는가?’라고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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