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 골목길, 그곳을 걷다

울종뉴스 / 기사승인 : 2008-04-04 14:41:49
  • -
  • +
  • 인쇄
.

[여행] 부산 골목길 여행

여행을 가고 싶다는 문자에 친구의 답장이 날아왔다. “골목길을 찾아 걷는 건 어때?” 엉뚱한 대답에 한참을 웃었는데, 이거 꽤 끌린다. 사실 나는 ‘그냥’이라는 대답과 함께 목적 없는 여행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꼭 유명한 관광지를 봐야하고 소문난 음식을 먹어봐야 한다지만, 개인적인 경험을 빌리자면 우연히 발견한 장소가 더욱 좋았고, 배가 고파 먹었던 음식이 훨씬 맛있었다.
대학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나는 언젠가 산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집들을 보며 ‘우리나라 건축 기술이 정말 대단하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감춰진 골목길이 궁금했었다. 일상의 나사 하나쯤 풀어버리고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는 모습도, 담 너머로 훔쳐보는 다른 이들의 일상도 제법 흥미로운 상상이다.
시동 걸린 호기심은 이미 저만치 출발해버렸고, 재빨리 핸드폰을 누른다. “골목길 여행이라… OK”





[범일동 안창마을]

‘소소한 이야기 속 숨은그림찾기’
부산진구와 동구 고지대에 걸터앉은 안창마을. 소소한 이야기가 있는 골목길을 그곳에서 만났다. 안창마을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허름한 집들이 산을 따라 층층이 들어서 있고, 구식 간판과 낡은 상점들은 지나간 시간을 대변한다. ‘은행나무 주차장’이라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정겹다. 바람개비가 도는 마당에는 누렁이 한 마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세탁소 앞 평상에는 아침을 맞이하는 동네 어르신들의 이야기꽃이 피었다. 오랜만에 보는 살가운 풍경이다.

골목 곳곳에는 소소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지역 미술가와 동의대 미대생들이 ‘안창고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 담벼락마다 생생한 벽화를 그려 넣은 것. 소외된 언덕마을과 소통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꽤 근사하다.
탕제원 옆 낮은 담벼락에는 주렁주렁 수박이 열리고, 슈퍼 맞은편 낡은 창고에는 해바라기가 활짝 피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새총을 조준하는 말썽꾸러기도 있는가 하면, 맞은 편 벽에 숨어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는 아이도 있다.
처마 끝을 신나게 미끄러지는 오리는 마냥 즐겁고, 엄마 뒤를 졸졸 쫓는 새끼들은 더욱 앙증맞다. 재밌는 아이디어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후미진 골목길 문패구경도 신이 난다. 펭귄, 꽃, 주사위 등 모양도 여러 가지고, 엄마 아빠 이름 밑에 가지런히 쓰여 진 아이들의 글씨가 참 따뜻하다.
골목 귀퉁이 벽면에는 ‘우진’이란 녀석이 바보 똥개라는 놀림 앞에 떡 하니 이름을 뒀다. 마침 빨래를 널러 마당에 나오신 할머니께 반갑게 인사를 해보지만 무심히 고개를 돌리신다. 어쩜 나는 일상을 훔쳐보는 낯선 불청객인지도 모르겠다.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범내골 하차▶7번 출구로 나와 29-1번 버스 또는 춘해병원 앞 마을버스 이용





[영선동 흰여울길]

‘바다가 보이는 풍경과 시인’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을 만나기 위해 영도로 향했다. 짭조름한 냄새가 코끝에 닿을 쯤 절벽 위로 작은 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네모난 종이상자에 창문을 그리고 파스텔 물감을 뿌려놓은 이국적인 풍경이 그곳에 놓여있다.

절영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걷다 피아노 계단을 올랐다. 빨강, 노랑, 초록, 검정 계단을 하나씩 밟고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다. 이곳에선 꼼꼼하게 짠 산책 코스나 지도는 필요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몸을 감춘다.
집과 집 사이의 좁은 골목길을 걸을 때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낭만이 충만한 곳이다.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가 닿을 만큼 좁은 골목을 빠져 나오자 봄 햇살을 잔뜩 머금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절벽 끝 골목길에 닿는다.

‘흰여울길’. 참 예쁜 이름을 가졌다. 달그락 달그락 밥 짓는 소리가 들리고, 빨랫줄에 널어놓은 티셔츠와 양말이 바닷바람에 나부낀다. 창가 베란다에는 그릇과 수저가 햇볕을 쬐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의 풍경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한참을 서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한 남자가 멀리서 다가온다. 예술가는 늘 배가 고픈 거라며 바나나를 넙죽 내민다. 예술가? 들고 있던 카메라 때문인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내친김에 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책들로 가득 찬 작은 방. 미닫이문을 열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다, 행복한 풍경이다. 바다를 보면서 글을 쓰는 그에게 부럽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지루한 일상을 부러워하는 내가 더욱 신기하다 했다. 바다가 보이는 골목길에서 만난 재밌는 인연이다. 그가 선물한 요구르트로 마음을 채우고 또 다른 골목길을 찾기로 했다.

>> 찾아가는 길 : 지하철 부산역 하차▶9번 출구로 나와 82, 85, 508번 버스 탑승▶테크노과학고 하차▶절영해안산책로 안내판 따라 이동





[감천동 태극마을]

‘가파른 산비탈 위 소박한 삶’
애교스런 말투의 슈퍼 아가씨가 삼거리 약국을 지나 언덕을 쭉 올라가란다. 숨이 턱에 찼을 때 쯤 옥상 위 파란 물통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부산시 사하구 감천동.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찾은 감천동은 왠지 서글프다. 소외되고 잊혀져 버린 판자촌과 경사진 달동네 골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감천동의 골목길은 힘겨운 삶의 미로다. 골목길을 지나는 내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오르며 내뱉는 가쁜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일관성 없는 색깔과 모양으로 현실을 만들어내고, 사이사이 좁은 골목길은 서로 다른 형태와 풍경으로 다가온다.
여느 달동네와 비슷한 것 같지만 강력한 색감과 거친 골목길은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창문 너머로 하나 둘 불이 켜지고, 골목길에도 어둠이 드리운다.
삼삼오오 모여 장난을 치던 아이들도 집으로 숨어버린다. 은근슬쩍 동네 어르신들과 말을 섞는다.

이곳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 온 태극도 신자들이 교주를 중심으로 모이면서 형성된 마을이란다. 얼마 전에는 영화촬영을 한답시고 서울 사람들이 다녀갔고, 요즘은 카메라를 든 젊은 사람들도 자주 보인단다.
사실 이방인들의 방문에 녹록치 않은 형편을 들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단다. 볼품없어 보여도 그들에게는 장성한 자식들이 찾아오고 힘든 하루를 데워주는 따뜻한 보금자리이니까.

골목길을 벗어나 마을 전체를 내려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파른 산비탈에 옹기종기 매달려 있는 감천동의 삶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공영주차장을 돌아 다시 언덕에 오른다. 시원한 바람에 숨을 고르자, 하나 둘 불빛이 켜지고 소박한 그들의 일상이 눈앞에서 포개진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토성동 하차▶부산대학병원 앞 택시 탑승 (기본요금)

글= 김윤경기자 / 사진= 이수열기자


[저작권자ⓒ 울산종합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