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공원

울산종합일보 / 기사승인 : 2019-05-02 11: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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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종합일보-홍성조의 역사‧문화이야기 11
▲ 학성공원
▲ 학성공원
▲ 학성공원
학성공원은 정유재란 중 1597년(선조 30년) 11월 초순부터 12월 하순까지 왜군 2만3000명이 동원,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헐어다가 쌓은 일본식 성이다.

성곽축조에는 여러 왜장이 참여했는데 전체 설계는 가토 기요마사가 총책임자였고, 축성공사는 오타 키즈요시의 감독아래 두 부장들이 맡았다.

성은 여러겹의 소곽이 단을 이루며 구축된 형태로 석성을 쌓은 주곽부와 토성으로 쌓은 외곽부로 구성했다.

주곽부는 해발 50미터인 산꼭대기에 본환을 두고 본환북쪽아래 해발 35미터 지점에 2지환을 배치했으며, 그 아래 서북쪽 해발 25미터 지점에 3지환을 두었다.

세성벽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1400미터이고 성벽의 높이는 10~15미터였다.

주곽부의 남쪽에는 군수물자 및 병력수송을 위해 항시 배를 댈 수 있는 유자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었다.

또한 주곽부 밖으로는 태화강 남쪽을 제외한 동‧북‧서쪽 3면에 2700킬로미터의 토루와 해자를 두르고 목책을 세워 외성을 구축했으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남아있지 않다.

또 성의 모양이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해 증성으로 불렀다.

▲ 학성공원
▲ 학성공원
▲ 학성공원

울산왜성은 1935년 사적 제22호로 지정됐으나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라는 점에서 국가사적에서 해제돼 1997년 울산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됐다.

1597년 12월23일 부터 1598년 1월4일까지 1598년 9월21일 부터 25일까지 두차례에 걸쳐 이 성을 공격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첫번째 전투때는 경리양호와 제독 마귀가 이끄는 명나라군과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 5만7000명은 성축공사를 끝낸 울산왜성을 급습했다.

성안에는 약 1만6000명의 왜군이 있었는데 성에 갇혀 고립된 왜군(일본군)은 식량과 물이 바닥나 전멸직전까지 몰렸다.

이에 종이와 흙벽을 끓여 먹는 한편 군마를 칼로 찔러 그 피를 마셨으며, 또 오줌을 마셔 목을 축이며 버티었다고 한다. 

 

▲ 학성공원
▲ 학성공원
당시의 전투상황을 그린 ‘울산성전투도’는 울산성에 갇힌 왜군을 구원하기 위해 김해 죽도왜성에서 달려온 일본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휘하의 화공에게 시켜 그린 그림이다.

그 이후 울산출신의 선각자 김홍조(1868~1922)선생이 울산 최초의 도심공원인 학성공원을 조성했다.

그는 이곳을 공원으로 꾸며서 당시 울주군에 기증할 목적으로 1913년 주변의 땅을 사들여 각종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었다.

그러나 1922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927년 그의 아들 김택천에 의해 울산군에 기증했다.

공원이 정식으로 개원한 것은 1928년 4월15일, 당시 공원이름은 ‘울산공원’이었다.

글 정리 : 홍성조(울산종합일보‧신문 발행인/대표이사)
사진 : 최상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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