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울종행사
“우리를 지켜 달라 매일 기도해요”LOVE in 울산- 장애인 가장 병용 씨
신섬미 기자  |  ujsm@uj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2017년 06월 14일  13:49:22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서툴러도 괜찮아 일어서고 앉는 것이 불편한 병용 씨지만 아이들에게 끼니를 챙겨주기 위해 부엌에서 요리를 준비하고 있다.
   
 

골목길을 헤매는 취재진을 향해 오늘의 주인공 김병용(57)씨가 3층 창문으로 내려다보며 “여기예요~” 하며 손을 흔든다. 3살 때 소아마비를 겪어 다리가 불편한 병용 씨는 취재진이 집을 찾는데 어려워하자 목발을 짚고 현관 앞까지 마중 나왔다. 집에 들어서자 “집이 좀 커요. 다들 제 사정에 이렇게 큰 집에 어떻게 사냐고 묻는데 주택보증공사에서 마련해줬어요. 예전에는 여섯 식구라서 이렇게 큰 집을 마련해줬죠”라고 말했다. 집 안은 정리되지 않은 각종 짐과 옷들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거실 벽에 붙어 있는 해맑은 웃음의 아이들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3살 되던 해 소아마비로 장애 판정
병용 씨는 피난민이셨던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쭉 자랐다. 금쪽같은 자식이었지만 시기를 놓친 예방접종 때문에 3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았다. 어릴 때는 걷기 힘들 정도로 다리가 불편했지만 꾸준히 노력한 덕분에 다행히 지금은 목발만 짚으면 어디든 외출이 가능하다. 

병용 씨는 초등학교 시절, 집에서 학교가 멀어 졸업을 못했다. 불편한 다리로 통학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공부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어려웠던 형편 탓에 16살부터는 공장에 다녔고 이후에는 도장과 명함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아 꽤 오랫동안 장사를 했다. 하지만 IMF로 인해 경기가 어려워지자 동생의 권유로 부산을 떠나 울산에 오게 됐다.

벌써 울산에 온 지 15년이 지났다. 울산에서 장애인창업지원금을 받아 삼산동에서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장애인 창업 성공사례에 나와 달라 권유 받을 만큼 장사가 잘 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죠. 점점 가게가 어려워져 직원들도 하나, 둘 해고 시켜야했어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이어 갔죠”

   
 

베트남 여성과 국제결혼 후 두 아이 입양
우여곡절을 겪으며 40대 중반을 넘긴 병용 씨는 ‘결혼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마음은 먹었지만 사실 장애인으로써 한국에서 결혼이 쉽지 않아요. 국제결혼정보회사에 문의도 해봤지만 비용만 1000만원이 들더라고요. 또 장애인은 300만원을 추가로 지불해야하고요. 그 많은 돈이 어디 있겠어요. 돈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병용 씨는 혼자 조금씩 공부했던 베트남어를 떠올리며 인터넷 채팅을 시작했다. 채팅을 통해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 중 한 여성과 7개월 동안 꾸준히 연락하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만날 사람은 어디서든 만난다고 했던가. 병용 씨는 당시 어려운 형편에서도 비행기 티켓을 끊어 베트남을 찾았고 공항에는 그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성분은 이미 베트남에서 한 번 이혼을 겪고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를 버리지 않고 키우는 강인한 모습에 반했고 결혼을 결심했죠” 병용 씨는 처음 만난 날 프로포즈를 했고 여성은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그길로 장인어른, 장모님을 찾아 며칠 동안 설득 끝에 결혼 허락을 받았다.

순탄치 않았던 과정들을 모두 헤쳐내고 두 사람은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한국에 들어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하지만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좋을 수 없었다. 베트남에 두고 온 아이들이 내내 걸렸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본인들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엄마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 병용 씨는 입양을 결심했다. “아이들을 한국에 데려올 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베트남 여자가 한국을 들어오는 것도 어려운데 그 자식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거든요. 매일 매일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갔어요. 운이 좋았는 지 결국 비자를 받을 수 있었죠. 하지만 아이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던 날 김해공항에서는 생전 없던 일이라며 한참 동안 붙잡혔었어요. 합법적으로 서류가 존재하니 무사히 통과는 됐죠. 김해공항 개국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결심이, 그 용기가 대단했다. 한국에서도 입양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어떻게 엄마랑 애들이 떨어져  삽니까”라고 말하는 병용 씨는 그렇게 7년간 두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친아버지 보다 천배, 만배 넘는 사랑을 쏟아 부었다고 자신했다. 아이들이 친아버지의 존재를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매년 베트남에도 보내줬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부부 사이에서 셋째 성배와 넷째 성경이가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계획에 없던 임신이라 당황했지만 병용 씨는 아이들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식구는 넷에서 여섯으로 늘어났다. 아이들이 커가자 들어가는 돈은 많은데 어려운 경기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결국 가게를 접어야하는 상황까지 갔다. 때마침 어둠 속의 한줄기 빛처럼 어렵사리 기초수급대상자에 들어갈 수 있게 돼 나라에서 매달 생활비가 조금씩 지급됐다.

   
▲ 집 한쪽에 걸린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

뜻하지 않은 이혼, 여섯에서 셋으로…
이대로라도 다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병용 씨의 바람에 그쳤다. 한국말을 익히고 바깥 외출이 잦아지던 아이 엄마가 3년 전,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이유는 더 이상 구속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각방을 쓴 지는 오래됐었어요. 한 집에 같이 살지만 대화도 없고, 각자 생활을 하고 있었죠. 아이 엄마는 친구들 만나러 나가길 좋아했어요. 본인이 돈을 벌고 싶어 했고요. 기초수급대상자는 경제활동을 시작하면 돈이 끊겨요. 안된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합의이혼을 하고 아이 엄마는 집을 구해 나갔어요” 성배가 6살, 성경이가 4살 되던 해였다. 

   
▲ 집 한쪽에 걸린 아이들의 어릴 적 사진

병용 씨는 화가 났다. 자기 자식을 거두는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우리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자기 자식은 버리지 않고 키우겠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결국 아이들을 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이 엄마 혼자 나갔어요. 첫째와 둘째에게는 제가 말했죠. 엄마랑 나가서 산다고 해도 미래가 없으니 같이 지내자고요. 제가 진짜 아버지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교육이나 미래에 대해 계획도 세워뒀었어요. 그렇게 같이 지냈는데 어느 날 밤늦게 들어오길래 야단을 쳤더니 첫째와 둘째가 엄마랑 살겠다고 나가버렸어요. 전처도 본인 아이들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애들 못 본 지 3년 됐네요” 

다행인 것은 전처가 성배와 성경이 때문에 멀리 이사 가지 않고 주변에 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병용 씨는 “그래도 용서되지 않는 것은 본인 아이들은 데리고 가서 키우면서 내 아이들은 이렇게 두고 갔다는 것이예요”라고 말했다. 

엄마 없는 빈자리는 티가 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를 보러 간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밥을 잘 챙겨먹지 못해 삐쩍 말라 있었다. “성배랑 성경이 손톱이 갈라지길래 찾아보니 영양이 부족해서 그렇다더라고요. 그 순간 아차 싶어서 지금은 돈이 생기면 우선 아이들 먹는데 다 쏟아 부어요. 한참 자랄 때라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해요. 늘 생활비가 모자라니 쌀이 떨어질 때도 있어서 주변에 도움을 받으며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겠다고 묻자 “다행히 기초수급대상자로 지정돼 있어서 아이들 교육비, 식비 등은 다 지원되고 있어요. 또 울산 남구청의 스포츠 바우처 사업으로 아이들이 태권도도 배우고 있어요. 덕분에 왕따도 당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요. 남구청 드림스타트 사업은 공연이나 영화, 캠프 등 각종 문화생활도 지원해주고 생일도 챙겨줘요. 이렇게라도 주변에서 도와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오죽하면 가장들이 번개탄 피우고 차 안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 지 시도 때도 없이 느꼈어요. 아이들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를 지켜 달라 기도해요”

괴로운 현실 속에서도 미래 꿈꾸는 병용 씨
병용 씨는 가게를 하면서 냈던 빚이 많지만 파산신청은 하지 않았다고 했다. “신용회복위원회에서는 어차피 돈 갚는 게 힘드니 파산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그러면 재기가 안돼요. 그래서 매달 조금씩 신용회복위원회로 넘어간 은행의 부채를 갚고 있어요. 이렇게라도 갚아나가야지 나중에 무슨 일이든 다시 시작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길 지나가면 돈 빌려준 사채업자들을 만나요. 돈 갚을 능력이 없다고 말하면 다행히 여유가 될 때 꼭 갚으라고 하고 그냥 가요” 

   
▲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지만 함께 있어 행복한 병용 씨와 두 아이 성배, 성경이.

이혼 후 경제적인 어려움과 심리적인 아픔으로 괴로운 시간들을 겪었던 병용 씨. 당시 상황들을 잊기 위해 2014년부터 방송통신대학교 컴퓨터과학과에 입학해 공부 중이다. 다리가 불편해 사무직 쪽으로 취업을 알아보니 학력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졸업을 앞두고 있어요. 학점도 거의 채웠어요. 졸업 전에 논문 대신 자격증을 제출해도 된다고 해서 현재는 기사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이예요” 8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 중인 병용 씨는 대학 졸업을 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 볼 생각이다.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열정과 의지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병용 씨는 본인을 기초수급대상자로 지정해 준 공무원에게 살 희망을 주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기초수급 제도가 너무 좋은 제도이지만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돈을 조금이라도 벌면 나라에서 주는 생활비가 바로 끊겨요. 사실 일이란 게 평생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특히 저와 같은 장애인들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고요. 취직을 하더라도 지원해주는 생활비를 단계적으로 줄인다면 재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다고 봐요. 또 따로 저축을 할 수 있으니 혹시 일을 그만두더라도 생활비에 대한 걱정도 덜고요”

다행히 힘든 상황을 겪었을 아이들은 그늘 없이 밝은 모습이었다. 때때로 ‘왜 엄마는 같이 살지 않냐’고 묻곤 하지만 크게 말썽 일으키지 않고 지내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다. 병용 씨의 세 가족이 조금 더 배불리 먹고 행복한 웃음을 지켜나갈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도움과 희망을 기대해본다.

글=신섬미 기자  /사진=박기민 기자 
 

   
 
신섬미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로그인
- 의견쓰기는 로그인후에 가능하며,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섹션별 인기기사
          기획특집
          여행탐방
          이시각 주요기사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44691)울산 남구 돋질로 82, 5F  |  Tel 052-275-3565  |  Fax 052-260-8385  |  사업자등록번호 610-81-32007
          인터넷신문사업등록번호 울산, 아01008  |  등록일자 2006.02.13  |  발행인/편집인 홍성조  |  청소년보호책임자 홍성조
          Copyright © 2013 울산종합일보. All rights reserved.